발렌베리 이야기-3 여행기

오늘날 발렌베리 왕국의 중심에는 지주회사 인베스터(Investor)가 있다.
80~90년대 복잡한 지분 정리를 거쳐 소유지배구조를 지주회사 체제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발렌베리는 소유기업들을 끊임없이 사고 판다. 
알짜기업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항상 최적화하는 것이다.
지난해 대형트럭 회사 스카니아를 폭스바겐에 팔았고, 
북유럽 증권거래소들을 운영하는 OMX는 나스닥-두바이증건거래소에 매각했다.

현재 인베스터의 핵심 자회사는 모두 8개다.

ABB: GE와 쌍벽을 이루는 중전기회사
아스트라제네카: 다국적 제약회사
아틀라스콥코: 건설, 광산 등 산업용 공구
일렉트로룩스: 세계 최대 가전업체
에릭슨: 스웨덴의 국민기업
허스키바나: 옥외 공구업체
사브: 전투기 등 방산업체
SEB: 글로벌 금융그룹

지주회사 인베스터의 이사들은 핵심 자회사의 이사회 회장, 부회장, CEO를 2~3개씩 맡으며
평생을 발렌베리 기업에서 일하는 전문 경영인들이다. 

이곳이 유럽 최대의 산업왕국이라는 발렌베리의 사령탑 인베스터다. 
특별한 표시가 없어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손바닥 만한 명패와 유리창 로고가 이곳이 발렌베리의 심장부임을 알려줄 뿐이다.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Essen non videri)'는 발렌베리 가문의 모토가 실감난다.
이 모토는 격렬한 대중적 비난에 시달렸던 격동의 1920~30년대를 헤쳐나가며 얻은 지혜라고 할 수있다.
사회민주당이 장기 집권한 스웨덴에서 부자로, 그것도 막대한 부를 손에 쥔 채 산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할 것이다.


핵심 자회사들의 로고가 창문에 붙어있다. 


마치 옛날 영화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 같다. 가죽 가방과 코트, 모자가 인상적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거나 전문 경영인 중 한명일까.

흥미롭게도 발렌베리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기업가가 아니다. 
인터넷에서 발렌베리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라울 발렌베리'라는 이름이 나온다.
2차대전때 헝가리 대사관에 근무하며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10만명의 유태인을 나찌 위협에서 구한 '스웨덴의 쉰들러'다.
라울은 종전 후 실종됐는데, 소련군에 납치돼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 냉전 붕괴후 밝혀졌다.

경영에 참여하지 않은 크누트 아가손 발렌베리의 형제 중 한명은 외교관이 됐고, 라울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인베스터 본사 인근에 라울을 기념하는 작은 공원이 있다.

스톡홀름은 잘 알려진 대로 여러 개의 호수와 섬으로 돼있다. 
드유르가르덴 섬은 과거 황제의 사냥터였던 곳으로 자연 환경이 잘 보존돼 있다.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인 야외 박물관 스칸센과 바사 박물관이 섬 초입에 있다.

 
버스를 타고 섬 안쪽으로 들어가 종점에 내려 조금 걷다보면 그림같은 집이 나온다. 
발렌베리 가문의 여름 별장 태카 우덴이다. 스웨덴 중산층이상은 대부분 여름 별장을 갖고있다.
태카 우덴은 1884년 크누트가 구입했다. 현재 발렌베리는 스톡홀름 외곽 브레빅으로 저택을 옮겼다.

 



발렌베리 이야기-2 여행기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의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SEB)은 날로 번창했다.
그의 저택에선 스톡홀름의 명사들이 모두 모이는 큰 무도회가 자주 열렸다. 
사회적 명예와 부를 손에 쥔 앙드레는 45세에 22살 연하인 열렬한 페미니스트 안나 폰 시도우와 재혼했다.
런던에서 예술과 언어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젊고 지적인 안나는 사교계의 스타였다. 
자선 활동에 적극 참여해 야외 박물관 스칸센과 북유럽 박물관 건립 기금 모금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페미니스트인 안나의 영향 때문인지 SEB는 유럽에서 최초로 여성을 은행원으로 채용했으며
막 경제 활동에 나서기 시작한 여성들을 위한 대출 상품도 시대를 앞서 내놓았다. 

앙드레는 집 정원사의 딸과 첫번째 결혼을 했다. 신분을 넘어선 사랑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은 출세를 걱정해 반대했지만 앙드레는 아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첫 부인은 다섯 번째 자녀를 낳던 중 사망하고 말았다. 
부인이 죽자 처제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함께 살았는데, 
둘 사이에 2명의 자녀가 또 태어났다. 처제와의 불륜(?)이다. 
이 떳떳하지 못한 관계는 이후 발렌베리에 대한 공격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1886년 70세로 숨을 거두면서 앙드레가 남긴 자녀는 21명이었다.
앙드레의 은행을 물려받은 것은 장남 크누트 아가손 발렌베리와  이복동생인 마쿠스 발렌베리다.
나머지 형제들은 경영에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크누트 아가손과 마쿠스 형제는 아버지가 남긴 은행을 기반으로 
부도난 우량기업을 하나둘 사들여 거대한 산업 왕국을 완성해 갔다.

아버지를 닮아 정치에 관심이 많던 크누트는 스톡홀름 시의회 의원이 됐고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스웨덴 외무장관에 임명돼 전시위기에서 조국을 지키는데 활약했다.

자녀가 없던 크누트는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딴 '크누트앤앨리스발렌베리재단'을 만들어 전 재산을 기부했다. 
현재 스톡홀름에서 크누트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스톡홀름 시청과 스톡홀름경제대학이다.

1900년대 초반 지어진 스톡홀름 시청은 건축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다.


스톡홀름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며, 매년 노벨상 수상식 축하연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크누트는 스톡홀름 시청 신축에 거액을 기부했다. 


노벨상 수상 축하연이 열리는 1층 홀이다.

 
2층 골든홀. 벽면이 황금으로 장식돼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댄스파티가 이 곳에서 열린다.


시청 2층에서 크누트의 흉상을 볼 수있다. 

이어서 볼 곳은 스톡홀름경제대학이다. 1909년 설립된 북유럽 최고의 명문 경영대학이다.  
크누트가 설립을 주도하고 많은 돈을 기부해 '발렌베리대학'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경제, 경영 관련 6개 학과가 있고 학부와 석박사과정, MBA가 운영된다. 
스웨덴에서도 최고의 수재들만 들어갈 수있다.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이 건물 하나가 학교의 전부다. 공간 활용을 위해 지하에도 강의실이 있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100년전 고풍스런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지하에 크누트 아가손 발렌베리(KAW)를 기념하는 강의실이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지금도 대학 이사회에 참여한다. 

  
3층에 발렌베리 가문의 4세대인 피터 발렌베리의 이름을 딴 강의실이 있다. 
피터는 80세가 넘는 고령으로 생존해 있다. 



발렌베리 이야기-1 여행기

지난 2월 중순 스웨덴 스톡홀름에 다녀왔다. 
내겐 발렌베리(Wallenberg)라는 이름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도시.
2006년 '존경받는 기업 발렌베리家의 비밀'을 쓴 이후 한번은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던차였다.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본래 1816년 스톡홀름 남서쪽 린쉐핑이란 작은 도시에서 
주교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앙드레는 무척이나 바다를 좋아했다. 
모험가이자 시인이었던 작은 할아버지(야콥 발렌베리)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오늘날의 발렌베리 가문을 일으킨 창업자는 앙드레지만 그 전세대의 역사도 살펴볼만하다.
가문의 역사는 1700년대 중반 린쉐핑의 야심많은 마쿠스와 야콥 형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자신들의 성(姓)을 '페르손'에서 귀족적이고 세련된 '발렌베리'로 바꾸었다. 
동생 야콥은 스웨덴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작가였다. 
그가 동인도회사 무역선을 타고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남긴 여행기 <갈레온 선의 나의 아들>은
18세기 스웨덴 산문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마쿠스-야콥 형제 커플은 발렌베리 전통의 원형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매 세대 '마쿠스'와 '야콥'이란 똑같은 이름을 가진 형제들이 중심을 이룬다.
현재 발렌베리 가문을 이끄는 것도 동갑내기 사촌형제인 또 다른 마쿠스와 야콥이다. 

아무튼 작가였던 동생 야콥은 32세에 요절했다. 
형 마쿠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쓰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앙드레의 아버지다.

앙드레의 아버지도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명문 웁살라 대학에서 철학과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처음 스웨덴어로 완역했다.
앙드레의 아버지 마쿠스는 자유주의 급진파 운동권이었다.
스웨덴 왕정에 반대하고 자유주의 개혁을 주장하다 대학에서 쫓겨나게 된다. 
한동안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급진파 혁명으로 국왕이 바뀌면서 재기 했다. 

다시 앙드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근무하던 앙드레는 정치인으로 먼저 성공했다. 
그는 아버지의 자유주의 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아 
1850년부터 30년 동안 스웨덴 의회와 스톡홀름 시의회를 정력적으로 종횡무진했다. 
미터법 도입서 금본위 환율제 도입, 여성해방까지 그의 관심사는 끝이없었다.

1856년 앙드레는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SEB)을 설립했다.
스웨덴 최초의 근대적 상업은행인 SEB는 이후 거대한 발렌베리 왕국의 모태가 된다.


SEB가 탄생 한 곳. 당시 앙드레의 집이 있던 곳이다. 
스톡홀름의 구시가인 감라스탄섬 스토르토리에트 20번지. 가운데 붉은 색 건물이다
지금 이 건물 1층은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카페로 쓰이고 있다. 
앞쪽에는 감라스탄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작은 광장이 있다.
광장 맞은 편에 노벨상 심사로 유명한 스웨덴 한림원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감라스탄은 스톡홀름의 유명한 관광 명소다. 수백년된 건물과 골목이 그대로 남아있다. 


SEB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가난한 농업국가이던 스웨덴에 산업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수많은 공장과 기업이 들어서고, 북쪽 지방에 묻힌 철광석과 산림을 개발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가 이루어졌다.
SEB는 해외에서 돈을 끌어와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해 큰 돈을 벌었다. 

당시 "스웨덴에는 2명의 군주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명은 왕궁에 사는 국왕, 또 한명은 쿵스트래드고드가탄에 사는 발렌베리.


쿵스트래드고덴, 즉 황제의 공원이다. 
과거에는 황제의 개인 공원이었지만 지금은 일반인을 위한 공원으로 바뀌었다.
여름에 더욱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뒤편으로 스톡홀름에서 가장 비싸다는 NK백화점이 보인다.



이곳이 스웨덴 제 2의 군주 발렌베리씨가 살던 곳이다. 공원 사진에서 오른편. 

SEB는 발렌베리에게 단순한 은행 이상이다. 가문의 뿌리이자, 조상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곳이다. 
발렌베리는 SEB를 통해 돈을 꿔갔다가 망한 기업을 인수해 우량기업으로 탈바꿈 시켰다. 
오늘날 발렌베리 왕국의 기업 대부분이 이런 경로를 통해 자회사가 되었다. 
지금은 지주회사 인베스터가 자회사의 지분을 소유하고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SEB가 중심에 있었다. 
현재 SEB는 인베스터의 자회사 중 한 곳으로 남아있지만 그 무게감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앙드레의 저택 옆으로 큰 길을 따라 3번째 건물이 SEB의 본사다.

  


정문 출입구 위 장식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일까.

SEB 건물의 장식물. 인도의 코끼리와 불상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무엇이든 돈이 되는 것은 사고 판다는 걸까.

지구본을 앞에 놓고 두 상인, 은행가(?)가 고민 중이다.
어떻게 돈을 벌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듯.

건물을 둘러치고 있는 쇠창살이 인상적이다. 
데이비드 바탈은 <제국-발렌베리 가문의 탄생>에서 이 건물을 감옥이나 요새와 같다고 표현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바탈은 발렌베리를 '부의 노예'라고 했다.



박원순 변호사, ‘창조적 소기업·농업이 희망입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

그는 ‘소셜 디자이너(Socal Designer)’다.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실천하는 독특한 직업이다. 2000년대 초 참여연대 활동을 정리하고 아름다운재단을 설립하며 직접 창안한 용어로 지금까지 명함에 적어 넣는다. 현재 그는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로 이뤄진 ‘희망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다. 바로 박원순(53)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다. 박 이사는 “글로벌 금융 위기는 오히려 한국 경제가 거듭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새로운 대안 경제 시스템에 대한 본격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대기업보다 창조적 소기업이 희망”이며 “농업이야말로 새로운 블루오션”이라고 말했다. 때마침 희망제작소 설립 3주년을 맞은 박 이사를 지난 3월 24일 서울 안국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최근 경제 위기로 대안 경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성장이 무한히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 일종의 ‘성장 신화’가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지금 밝혀졌습니다. 지금의 생산성이 계속 달성될 것이라는 환상이 깨진 겁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경제 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어요. 그동안 그런 주장들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앞으로 더욱 많아질 겁니다. 한국은 지금까지 다른 나라를 따라서 여기까지 왔어요. 하지만 여기서 더 나가려면 창조적 자본주의, 창조적 경제 시스템, 창조적 기업이 필요해요. 그게 뭔가에 대해 이제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보통 국내총생산(GDP)은 기업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영국은 전체 GDP의 20%를 사회적 기업에서 창출하겠다고 해요. 사회적 기업은 기업과 비영리단체의 중간이지요. 미국도 GDP의 7%가 비영리단체에서 나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영학석사(MBA)에는 사회적 기업이나 소셜 벤처 과목에 학생들이 몰리는데 한국은 가르치지도 않아요. 변화를 제대로 캐치해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는 거죠.

어떤 방향의 변화를 느끼는지요.

한국에서 활동하는 영국의 최고경영자(CEO)를 만났는데, 그분 말이 30년 전 영국에서 잘나가던 산업이 전부 일본과 한국에 와 있다는 겁니다. 영국에는 지금 자동차 회사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영국은 망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전보다 훨씬 잘 살아요. 한국 경제의 주축인 자동차 조선 철강은 어떻게 보면 전통시대의 ‘굴뚝 산업’입니다. 우리가 계속 갖고 있으면 좋지만 힘들어요. 당장은 아니겠지만 결국 10년, 20년, 30년이면 중국 인도 브라질로 다 갈 거예요. 우리에게 지금 대안적 고민과 산업이 필요해요. 정부가 선정한 10대 성장 동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에코 산업이나 커뮤니티 비즈니스, 창조적 아이디어 산업, 아트와 결합된 산업, 관광산업 쪽의 가능성이 엄청납니다. 농촌에서 그린투어리즘만 잘해도 소득을 몇 배로 끌어올릴 수 있지요. 도시화가 될수록 사람들은 자연에 목말라 해요. 아토피는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오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옵니다. 자살률 세계 1위, 이혼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 이런 것들이 다 그런 연장선이죠. 영국에선 농민들이 먹는 밥 먹여 주고 하룻밤 재워주면서 20~30달러씩 벌어요. 우리 주변에서 소홀이 하고 있는 것일수록 미래에는 빛을 볼 가능성이 커요. 또 흔히 경제는 경제인만 하고 경제를 고민해야 경제가 잘된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이제는 융합적 사고가 핵심이에요. 경제는 경제 외적인 요소를 고민함으로써 더 잘될 수 있어요.

융합적 사고는 어떤 겁니까.

이를테면 예술가와 정보기술자가 함께하고, 우리 민속과 역사도 전부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단’은 1년 매출이 현대자동차와 맞먹을 정도지요. 그런데 우리는 국립 서커스 학교조차 없어요. 목포에 가면 원도심이 있는데, 그걸 밀어버리고 주택을 짓는다고 해요. 정말 어이없는 일이지요. 옛날 유명한 동춘서커스단 자리가 거기에 있어요. 그래서 동춘서커스단을 복원하고 그 옆에 국립서커스 학교를 열자고 제안했지요. 그러면 아시아 최초이자 최고인 아트 서커스단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북한 평양교예단을 데려와 스토리텔링을 더해 ‘심청전’이나 ‘춘향전’을 세계에 파는 겁니다. 한국인은 굉장히 창의적이고 예술적 재능이 많기 때문에 이것만 잘 열어주면 판도라의 상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소기업이 희망’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과거 한국 경제는 너무 대기업 중심이었어요. 물론 대기업도 중요하고 나름대로 성장해야 하지만 동시에 보완적인 것으로 창의적인 소기업, 우리 자신의 자산을 기초로 하는 소기업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해외에도 진출해야 합니다. 외국에는 아주 강한 소기업들이 많아요. 독일에서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100대 소기업을 본 적이 있는데, 그중 극장에 설치하는 무대 커튼을 만드는 기업이 있었어요. 큰 것은 무게도 많이 나가고 창의적인 기술과 아이디어가 필요하지요. 우리도 이런 소기업이 많이 나와야 해요. 물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걸 사업화해 기업으로 성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정이지요. 정부 지원도 필요하지만 핵심은 마케팅이에요. 좋은 소기업들이 자신을 온전히 알릴 기회가 없는 겁니다. 우선 판매가 잘돼야 다음 단계로 제품을 업그레이드하고 디자인도 개량할 수 있는데 원천적으로 알릴 기회가 없으면 안 되는 거죠. 다행히 희망제작소는 좋은 사회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기업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할 수 있지요.

소기업발전소를 만들었는데, 어떤 활동을 합니까.

아이디어는 좋은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을 ‘희망소기업’으로 선정해 지원합니다. 얼마 전 소기업들을 작가들이 방문해 글을 써 인터넷에 연재했어요. 그것을 보고 방송이나 신문사가 관심을 많이 갖지요. 또 컨설팅이나 디자인을 도와주는 ‘착한 전문가 그룹’이 있어요. 인터파크에 ‘희망소기업’은 무료로 입점할 수 있게 돼 있고 디자인은 디자인진흥원이 무료로 해 줍니다. 이미경 CJ 부회장의 지원으로 CJ홈쇼핑 채널에 무료로 나갈 수 있게 약속을 받았는데, 아직은 기업들이 일정한 수준에 오를 때까지 1~2년 더 준비하려고 해요. 최근에는 희망소기업에 투자하는 국민기금을 만들어 보자는 논의도 시작했지요. 올해는 소기업발전소 활성화에 주력할 생각이에요. 희망소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성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 취약 계층 지원에 초점을 맞추는 마이크로크레디트와는 차이가 있지요.

3년째 전국을 돌며 희망 탐사를 하고 있는데요.

2006년 3월부터 시작해 꼭 3년이 됐지요. 광주와 전남을 출발해 전국을 돌며 1000명 정도를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지난번에 의정부 동두천 양주 포천을 다녀왔고 이제 경기도 북부지역 몇 곳이 남았어요. 3년 동안 다니니 지역에 관한한 전문가가 됐어요. 현장에서 만난 분들의 지식과 고민을 함께 나누면서 얻은 것이지요. 현장에 가면 비전이 나옵니다.

희망 탐사에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외형적으로 보면 절망적이지요. 농촌은 고령화되고 지역사회는 붕괴 직전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를 살리고 농업을 재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례들을 확산하고, 그런 게 가능하도록 제도를 정비해 주면 오히려 농업이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일본 언론들은 ‘농업이 일본을 구한다’는 특집 기사를 대대적으로 싣고 있어요. 실제로 일본은 농업을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보고 있지요. 탈샐러리맨 현상으로 농업 경영자가 크게 늘고 있어요. 도시에서 마케팅이나 금융 쪽 일을 해 본 사람은 시골에 가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요. 농업도 농업만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우리 시대는 융합의 시대예요. 정보기술(IT) 전문가, 예술가들이 농업을 해야 합니다. 또 농업에도 고수가 있지요. 희망 탐사에서 만난 한 농민은 비닐하우스 자동 개폐기를 만들어 이 분야 최고의 선진국이라는 덴마크 네덜란드 이스라엘에 100억 원어치를 수출합니다. 농업 발명왕이지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으면 도전할 것이 너무 많아요.

약력: 1956년 경남 창녕 출생. 75년 서울대 법대 중퇴. 79년 단국대 사학과 졸업. 91년 런던 정경대 수료. 80년 사법시험 합격(22회). 82년 대구지검 검사. 86년 대한변협 인권위원. 95년 참여연대 사무처장. 2002년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현). 2003년 사법개혁위원회 위원. 2004년 포스코 사외이사. 2006년 희망제작소 상임이사(현).

인터넷 통한 ‘집단금융’ 열기 확산 경제 이슈

지난 1월 영국 국립과학기술예술재단(NESTA)과 오픈비즈니스는 P2P 금융 연구 프로젝트(webank.org.uk)를 출범시켰다. 세계적으로 P2P 금융 관련 기업이 크게 늘어나는 최근 추세에 발맞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프로젝트의 명칭이다. ‘위 뱅크(We Bank)’. 평범한 보통 사람 개개인이 곧 은행이라는 선언이다. 기존 은행 시스템에 대한 강한 불신을 담고 있다. P2P 금융은 바로 은행 등 기존 금융회사의 중간 매개 없이 낯선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집단적으로 돈을 모아 대출해 주고, 투자하고, 환전해 보자는 새로운 실험이다.

P2P 금융은 인터넷의 발달로 등장했다. P2P(Peer-to-Peer)는 본래 인터넷에서 중간 서버를 거치지 않고 개인과 개인이 직접 연결돼 파일을 공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P2P 금융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금융회사를 거치지 않고 개인들이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P2P 금융은 ‘개인 간 직거래 금융(Person-to-Person Finance)’이나 ‘웹2.0 금융’, 또는 ‘사회적 금융(Social Finance)’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간 매개자를 배제해 ‘더 영리하고, 더 공평하고, 더 인간적인’ 금융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출에서 투자, 환전까지 ‘진화’

다소 황당해 보이는 이 모델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5년 영국에서 조파(Zopa)가 문을 열면서부터다. 이듬해 미국에서 선보인 프로스퍼(Prosper)는 큰 시장을 발판으로 급성장해 지금은 규모에서 조파를 앞지르고 있다. 미국 렌딩클럽(Lending Club), 독일 스마바(Smava) 등도 유명하며 국내에선 2007년 머니옥션과 원클릭이 설립돼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조파의 비즈니스 모델은 생각보다 잘 짜여 있다. 조파는 1998년 영국의 온라인 은행 에그(Egg)를 함께 시작했던 3명의 공동 창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벤치마크캐피털, 베세머벤처파트너스 등 유명 투자회사에서 1600만 파운드(약 290억 원)를 투자 받았다. 현재 조파 회원은 26만 명에 달한다. 조파는 돈을 빌리려는 사람들의 신용등급을 A*, A, B, C, Y(영 마켓) 등 5개 등급으로 나눈다. 여기서 평가된 신용 등급은 대출 이자율에 반영된다. 만약 대출 신청자가 이러한 등급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조파를 이용할 수 없다. 이런 조파의 엄격한 사전 신용 평가는 부실채권 비율을 0.3%라는 경이적인 수준에 묶어둘 수 있는 비결이다.

돈을 빌려 주려는 투자자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분산 투자를 원칙으로 한다. 하나의 대출 신청에 10파운드(약 2만 원) 이상 투자할 수 없다. 만약 그 이상 투자하려면 10파운드 단위로 나눠 다수의 대출자에게 분산 투자해야만 한다. 또 개인별 투자 한도도 2만5000 파운드(약 4900만 원)로 제한하고 있다. 다수의 대출자가 동시에 상환 불능에 빠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점에서 상당히 합리적인 구조다. 투자자의 수익률은 5개 등급 마켓 가운데 어디에 속한 대출자에게 투자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신용 등급이 높은 A*에 투자하면 부실 가능성은 없지만 낮은 수익률에 만족해야 한다.

조파는 대출자들에게 118.5파운드(약 23만 원)의 수수료를 일률적으로 받는다. 하지만 조기 상환 수수료 등 기타 추가적인 수수료는 전혀 없다. 반대로 투자자에게는 매년 총투자 금액의 1%에 해당하는 서비스 비용을 받아 수익으로 삼는다. 이 밖에 보장보험을 팔아 추가 수익을 창출한다.

조파는 부실 가능성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지만 이를 100% 막을 수는 없다. 실제 전혀 만난 적이 없는 낯선 사람에게 돈을 빌려줘야 한다는 부담도 여전하다. 또 은행 예금과 달리 조파 투자금은 원금 보장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파를 통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데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장애인 아들에게 휠체어를 사주려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줬다는 것에 더 뿌듯해 한다.

키바(Kiva)는 P2P 금융의 또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동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단합을 뜻하는 ‘키바’는 2004년 말 실리콘밸리의 프로그래머 부부에 의해 시작됐다. 간단히 말해 저소득층이 자활할 수 있게 창업 자금을 무담보로 빌려주는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인터넷으로 옮겨 놓은 형태다. 차이가 있다면 타지키스탄 페루 캄보디아 에콰도르 우간다 등 저개발국 창업 지망자들이 그 대상이라는 점이다.

참여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홈페이지에 접속해 자신이 돕고 싶은 사람을 선택한 뒤 일정액(계좌당 25달러)을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된다. 이 돈은 창업 희망자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고 현지에서 활동하는 마이크로크레디트 단체로 보내진다. 중요한 것은 키바를 통해 후원자가 내는 돈이 기부금이 아니라 대출금이라는 것이다. 대출금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상환해야 한다. 후원자들은 자신이 빌려준 돈이 어떻게 쓰이고 빌려간 사람의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홈페이지와 인터넷을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키바는 2005년 3월 우간다의 한 여성이 생선 가게를 차리는 데 필요한 500달러를 처음 대출한 뒤 지금까지 모두 40만 명에게 6000만 달러를 대출해 줬다. 놀라운 것은 대출금 상환율이다. 키바의 대출금 상환율은 97.5%를 기록하고 있다.

셀어밴드(Sellaband)는 음악 유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한다. 네티즌들이 돈을 모아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음반을 낼 수 있게 해 준다. 무명 음악가들은 셀어밴드에 음악을 올리고 사용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면 음반을 낼 수 있다. 사용자들의 반응은 이들이 지불한 돈으로 평가된다. 셀어밴드에서 음악을 들어본 다음 마음에 들면 10달러를 기부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5만 달러가 모이면 셀어밴드가 음반 녹음을 위한 스튜디오와 경험 있는 음반 제작자를 제공한다.

네티즌 모여 축구클럽도 인수

이렇게 만들어진 음반의 판매 수익은 투자자들에게 배분된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단순한 수익 배분만이 아니다. 훌륭한 음악가를 발굴했다는 자부심도 갖게 된다. 2006년 설립 이후 29개 밴드가 5만 달러 이상을 후원받아 앨범을 발매했다.

어 스웜 오브 에인절스(A Swarm of Angels)도 비슷한 형태다. 하지만 이번에는 투자 대상이 영화다. 영화 제작자와 작가들이 모여 만든 오픈소스 영화 제작 프로젝트다. 100만 파운드의 기금을 모아 영화를 제작한 뒤 전 세계 100만 명이 온라인으로 무료로 내려 받도록 하는 게 프로젝트가 내건 목표다.

미드포인트&프랜스퍼(Midpoint&Transfer)는 국제 공금과 환전에 P2P 금융 방식을 적용했다. 이용자 한 명당 최대 25만 파운드까지 환전을 요청할 수 있다. 일단 환전 요청이 들어오면 그에 맞는 환전 요청자들을 자동으로 매칭해 연결해 준다. 거래가 끝나면 환전 금액이 각 이용자가 속한 지역 은행 계좌에 입금된다. 일반 은행은 매매 기준율을 중심으로 1.5~2% 범위에서 환전 수수료를 챙기지만 미드포인트는 환전 금액에 관계없이 한번 거래할 때마다 30파운드의 수수료를 받는다.

축구 팬들끼리 돈을 모아 아예 구단을 인수한 곳도 있다. 지난 2007년 축구 기자 출신인 윌 브룩스가 주축이 된 마이풋볼클럽(MyFootballClub)은 ‘2만 네티즌 모으기 캠페인’을 벌여 잉글랜드 5부 리그팀인 엡스플리트를 70만 파운드(약 14억 원)에 인수했다. 애초 이들은 유명 클럽을 포함해 15개 구단을 인수 대상으로 선정했지만 실현 가능성과 구단 재정을 고려해 7개로 압축했다. 운영진은 각 팀을 돌며 재무적, 영업적 현황에 대한 꼼꼼한 실사를 벌여 구단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네티즌에게 보고한 뒤 2만여 회원의 합의를 거쳐 최종 인수 구단을 결정한 것이다.

현재 마이풋볼클럽의 회원은 세계 73개국 3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1인당 1년에 35파운드(약 7만 원)를 내고 구단을 소유한다. 이들은 팀 전술이나 선수 계약, 구단의 결정에 찬반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세상 바꾸는 ‘아웃사이더 경제’ 경제 이슈

세계 최초의 P2P(Peer-to-Peer) 금융 업체 조파(Zopa). 2005년 설립된 이 영국 기업은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라는 요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 붕괴로 은행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면서 인터넷을 통해 개인끼리 직접 돈을 빌려 주고 빌려 쓴다는 이 회사의 대안 모델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금융권의 몰락이 뚜렷해진 지난해 하반기에 여유 자금을 빌려 주기 위해 조파에 가입한 신규 회원은 전년 대비 81%나 늘었고 대출 중개 금액도 78% 급증했다. 올 들어서도 매달 신규 회원과 대출액이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P2P 금융 모델은 기존 금융회사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시장조사 기관인 미국 포레스트리서치에 따르면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은행이 소비자들의 이해보다는 자신의 이해를 우선하며 윤리적 경영을 하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은행들은 수많은 직원을 고용하고 점포망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며, 요즘 전 세계가 극적으로 경험하는 것처럼 파괴적인 금융 공황을 불러오기도 한다.

‘더 영리하고, 더 공평하고, 더 인간적인’ 

P2P 금융은 ‘사람이 은행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은행이 챙겨가는 예대마진(예금과 대출의 금리 차이)을 없애거나 대폭 줄임으로써 대출자는 더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고, 투자자는 더 높은 수익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P2P 금융은 돈을 빌리고 갚는 ‘더 영리하고, 더 공평하고, 더 인간적인 방식’이라는 게 조파의 설명이다. 지난해 터진 글로벌 금융 위기는 이러한 조파의 강점이 부각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유리한 금리와 높은 수익률이 조파가 인기를 끄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상당수 조파 회원들은 은행을 배제하는 P2P 금융을 통해 보다 윤리적으로 돈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빌려 준 돈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사회적 영향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이자율보다 자선적 동기에서 조파를 통해 돈을 빌려준다. 반대로 돈을 빌린 사람도 꼬박꼬박 이자를 지불하는 대상이 탐욕스러운 은행이 아니라 ‘진짜 인간’이라는데 더 신경을 쓰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조파의 사례는 금융은 신뢰를 바탕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갚는 것이라는 소박한 진실을 일깨워준다.

2005년 처음 등장한 P2P 금융은 이제 본격적인 도약기를 맞고 있다. 영국 국립과학기술예술재단(NESTA)과 오픈비즈니스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지난 4년간 P2P 금융 업체는 모두 30여 개로 증가했다. 특히 영국을 비롯해 미국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스웨덴 일본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온라인뱅킹리포트는 P2P 금융 시장 규모가 2010년 10억 달러, 2017년에는 9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최근에는 미국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가 P2P 금융을 ‘2009년 주목해야 할 비즈니스 아이디어’로 선정해 눈길을 끌었다. HBR는 인터넷과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가 P2P 금융 확산의 중대한 발판이 되고 있다고 분석하고 향후 5년 이내에 기존 주요 은행들이 P2P 금융 비즈니스에 뛰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P2P 금융의 대표 주자인 조파의 성공 사례는 세계적으로 대안 경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이유를 잘 보여 준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는 수십 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신화’의 붕괴를 의미한다. 세계경제의 성장이 끝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환상, 최첨단 금융 기법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위기를 통해 드러난 진실은 끔찍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에 따르면 지난 30년간 세계 93개국에서 무려 112번의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 세계는 만성적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 위태롭게 서 있으며 금융 위기는 결코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바로 ‘상시 금융 위기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대안 경제의 모색은 한국 경제의 현주소와 관련해서도 중요성을 갖는다. 한국은 그동안 대기업 중심, 수출 주도, 선진국 모방을 통해 놀라운 경제 기적을 일궈냈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한국 경제를 업그레이드하고 10~20년 후 세계적인 산업 지형의 변화에 대응하려면 창조적 산업, 창조적 기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분야의 균형 잡힌 성장과 사회 소외 계층에 대한 배려도 필수적이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지역 공동체와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손실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라며 “희망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존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균형 감각과 역발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안 경제 모델들은 유쾌한 상상력을 담고 있다. 끊임없이 진화한다. P2P 금융만 하더라도 단순한 대출 형태에서 벗어나 다양한 실험이 시도되고 있다. 쿠버라 머니(Kubera Money)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계’를 온라인에 접목한 모델을 준비 중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진 키바(Kiva)는 인터넷으로 돈을 모아 저개발국 창업 희망자들에게 빌려준다. 축구 팬클럽이 돈을 모아 축구단으로 아예 인수하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에 투자하기도 한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통화 정책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지역화폐 운동도 활기를 띠고 있다. 미국 미주리 주 북동부의 친환경 공동체인 ‘춤추는 토끼 환경마을’에는 ‘양상추 은행’이라는 지역은행이 있다. 주민들이 이 은행이 발행한 ‘그린(Green)’이라는 화폐를 이용해 물건을 산다. 지역 화폐 운동은 무너진 지역 공동체를 되살리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국내에서도 활발하다. 이 밖에도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 소액 대출)나 사회책임투자(SRI), 사회적기업은 정부와 기업, 금융권에서도 이미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는 분야다.

물론 대안 경제는 끝없는 모색의 과정이다. 완벽하지도 않고 완성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상상력, 가능성의 지평은 그만큼 넓어지고 있다.

기업가 정신이 희망이다: 영국 경제 이슈

‘자본주의의 발상지’ 영국 제조업의 쇠락은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글로벌 신용 위기 여파로 잘나가던 금융 산업마저 침체에 빠져 대안 찾기에 나선 영국 정부의 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다. 디자인, 광고 같은 크리에이티브 산업과 신·재생에너지 분야가 유일한 희망으로 꼽힌다. 모두 창조적 기업가 정신이 필수적인 분야다. 영국이 필사적으로 기업가 정신 살리기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17일 5만5000여 명의 영국 각급 학교 학생들은 오전 9시가 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들은 비즈니스 플랜 경진 대회인 ‘메이크 유어 마크 챌린지(Make your Mark Challenge)’ 참가자들. 9시 정각 공개된 이날 과제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이었다. 올림픽조직위원회의 도움 받아 청소년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한 것이다. 영국 전역에서 14~16세, 16~19세 두 부문으로 나눠 참가한 학생들은 하루 동안 각자 팀을 만들어 올림픽 때 성공할만한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실제 사업화에 필요한 자금 조달 계획까지 짜내느라 열을 올렸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것은 기업가 정신 운동 단체인 ‘메이크 유어 마크’다. 정식 단체명은 ‘엔터프라이즈 인사이트(Enterprise Insight)’지만 대외적으로는 캠페인 명칭인 ‘메이크 유어 마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지난 2004년 영국상공회의소, 중소기업연합(FSB), 영국산업연맹(CBI), 기업가협회(IoD) 등 4대 경제 단체가 공동 설립한 비영리 단체로 출발했다. 이 단체 크리스 스파빈 국제캠페인 담당은 “청소년들에게 기업가가 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는 캠페인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해 만들어졌다”며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4대 경제 단체가 함께 손을 잡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제1회 세계 기업가 정신 주간 열려

메이크 유어 마크는 민간단체들이 주도해 설립됐지만 100%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 설립 첫 해에는 지원금이 수십만 파운드에 불과했지만 매년 크게 늘어 지난해에는 500만 파운드(약 100억 원)를 지원 받았다. 토니 블레어 정부에서 10년 동안 재무장관을 지낸 고든 브라운 현 총리는 초기 설립부터 지금까지 가장 강력한 후원자다. 작년 말 메이크 유어 마크는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고 조직 규모를 키우기 위해 자선단체 지위를 얻었다. 일반 기업의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한 조치다.

‘메이크 유어 마크 챌린지’는 이 단체가 수년째 개최해 온 이벤트지만 지난해 행사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메이크 유어 마크는 지난해 11월 17~23일 미국의 대표적 기업가 정신 운동 단체인 카우프만재단과 함께 ‘제1회 세계 기업가 정신 주간(Global Entrepreneurship Week)’을 열었고 그 첫날 행사로 이 대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고든 브라운 총리는 당시 “기업가 정신 주간은 그동안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으며 세계 기업가 정신 주간을 통해 전 세계의 기업가 캠페인으로 연결될 것”이라며 “전 세계 젊은이들의 창의력과 아이디어를 개방함으로써 우리는 성공적인 제품과 내일의 기업을 창조할 수 있다”고 힘을 실어줬다. 영국과 미국은 물론 세계 77개 나라에서 동시에 개최된 세계 기업가 정신 주간 행사에선 2만5000여 건의 각종 이벤트가 열렸으며 300만 명이 여기에 참여했다. 고든 브라운 총리뿐만 아니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아놀드 슈워제네거 미국 캘리포니아주지사,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 마이클 델 델컴퓨터 회장 등 유명인들도 직간접으로 대거 참석해 행사를 빛냈다.

고든 브라운 총리의 지적대로 ‘기업가 정신 주간’은 영국에서 시작된 아이디어다. 2004년 설립된 메이크 유어 마크는 가장 효과적인 캠페인 플랫폼을 고민하다 ‘주간’ 형태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연관된 행사들을 특정 기간에 집중함으로써 언론의 더 큰 주목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기업가 정신 주간 행사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조직이 커지면서 점차 영역을 확대하게 된 것이다. 기업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주간이란 형태가 효과적이지만 한계도 안고 있다. 기업가에 흥미를 느낀 청소년들에게 실제적인 지식과 경험을 쌓게 하려면 한발 더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메이크 유어 마크는 현재 수많은 캠페인과 교육 프로그램을 연중 내내 진행하고 있다. 또한 메이크 유어 마크가 시작한 기업가 정신 주간은 미국 등 여러 나라로 빠르게 확산됐으며 세계 기업가 정신 주간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단체의 캠페인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메이크 유어 마크 위드 어 테너(Make your Mark with a Tenner)’다. 테너는 10파운드(약 2만 원)를 가리킨다. 2만 명의 학생들에게 10 파운드씩 나눠주고 한 달 동안 운영해 이익을 내도록 하는 흥미로운 프로젝트다. 10파운드는 물론 대출이다. 하지만 한 달 후 이자 없이 원금 10파운드만 갚으면 된다. 1등상은 사회에 더 긍정적인 영향을 주거나 더 많은 이윤을 낸 팀에게 주어진다. 지난해 처음 시작해 큰 인기를 끌자 올해는 전체 자금 규모를 20만 파운드로 두 배 늘렸다. 이 돈을 낸 것은 영국의 유명 기업가인 피터 존스 폰즈인터내셔널그룹 회장과 마이클 버치 비보(Bebo) 창업자다. 통신과 미디어로 큰돈을 번 피터 존스 회장은 BBC의 벤처캐피털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드랜곤스 덴(Dregon’s Den)’에 출연해 대중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인물이다. 마이클 버치 창업자는 2005년 온라인 소셜 커뮤니티 사이트인 ‘비보’를 만들어 키웠으며 지난해 8억5000만 달러에 AOL에 매각해 ‘대박’을 터뜨렸다.

‘10파운드 비즈니스 체험’ 인기

학생들에게 10파운드를 대출해 주고 비즈니스 체험을 하게 하는 이 이벤트는 영국 언론에도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디어에 나타난 영국 청소년은 대부분 나태하고 게으르며 반사회적인 반항아의 이미지다. 10파운드를 받아들고 사업 계획을 짜는 학생들은 이런 선입견을 깨고 ‘문제투성이’ 영국 청소년들도 사회에 도움 될 수 있고 믿을 만하다는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해준다.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 위기는 이러한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크리스 스파빈 국제캠페인 담당은 “최근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지만 기업가 정신은 이러한 위기 극복에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선 혁신적 기업가들은 더 빨리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역사는 위기 속에서 성공한 기업이 나온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한 경기 침체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조만간 회복기가 찾아오며 한발 앞서 준비한 자만이 이때 힘차게 치고 나갈 수 있다. 바로 영국이 위기 속에서도 기업가 정신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유다.

기업가 정신이 희망이다: 스웨덴 경제 이슈

1인당 국내총생산(GDP) 4만3000달러가 넘는 북유럽의 부국 스웨덴. 완벽한 복지 제도로 삶의 질에서는 더욱 앞서 있는 나라. 에릭슨에서 볼보, 사브, 일렉트로룩스, 이케아, H&M까지 뛰어난 글로벌 톱 컴퍼니들을 보유한 나라. 가난한 농업국에 불과하던 스웨덴이 20세기 초 선진 공업국으로 올라선 비결은 다름 아닌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었다. 글로벌 금융 한파로 전 세계가 꽁꽁 얼어붙은 오늘, 스웨덴은 바로 그 기업가 정신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북구의 겨울은 황량하다. 무공해의 투명한 하늘과 아름다운 호수, 밤새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을 즐기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찾아드는 여름철과는 딴판이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선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오후 4시께면 차량들은 벌써 전조등을 켜기 시작한다. 특히 올해는 우울한 경제 뉴스들로 더욱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연초부터 스웨덴 경제계는 자동차 산업의 양대 산맥인 볼보 승용차와 사브 매각설로 뒤숭숭한 상태다. 이들 브랜드는 지난 1999년과 2000년 미국 포드(볼보 승용차)와 GM(사브)에 팔렸지만 스웨덴 내 생산 기반은 그대로 유지해 왔다. 그러나 경영난에 몰린 GM과 포드가 이들을 다시 매물로 내놓은 것이다. 볼보는 이미 지난해 8월 스웨덴 국내에서만 1200명을 감원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한 바 있다. 경제계 일각에서는 스웨덴의 핵심 산업 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 볼보와 사브를 인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양사가 합병을 통해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지난 2월 20일 사브는 결국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경제 위기 여파…구조조정 칼바람

스웨덴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 예상치를 마이너스 1.1%로 대폭 낮춰 잡고 있다. 세계경기 위축으로 수출 의존도가 높은 스웨덴 경제에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웨덴 크로나화(貨)의 약세로 주력 산업의 수출 경쟁력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으며 금융권이 건재하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스웨덴 언론들은 실업률 증가 등으로 상당 기간 고통은 이어지겠지만 2011년부터는 경기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최근 경제 상황과 맞물려 스웨덴에서도 ‘기업가 정신’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스톡홀름기업가정신대학(SSES: Stockholm school of Entrepreneurship) 닉 케이 총괄이사는 “스웨덴은 전통적으로 대기업이 주도하는 경제구조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고용 측면에서도 계속해서 혁신 기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1999년 스웨덴의 각 분야 최고 명문 대학들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SSES는 기업가 정신에 특화된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청에 해당하는 스웨덴경제·지역개발청(뉴텍: Nutek) 카린 뤼덴 기업가 정신 프로그램 담당 이사는 “스웨덴은 더 많은 신생 기업, 더 많은 성장 기업을 필요로 한다”며 “이를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스웨덴은 100여 년 전 왕성한 기업가 정신으로 산업화의 기적을 일으킨 나라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스웨덴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전 국토의 10%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였다. 하지만 뛰어난 기업가들이 대기업을 일으키면서 1900년대 초반에는 이미 선진 공업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됐다. 스웨덴의 최대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이 바로 이 시기에 맹활약을 펼친 주인공 중 하나다.

발렌베리의 창업자는 해군 장교 출신인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다. 그는 40세 때인 1856년 스웨덴 최초의 근대적 상업은행인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현 SEB)을 열었다. 빠르게 번져가는 산업화의 흐름을 읽고 과감하게 뛰어든 모험이었다. 발렌베리는 이후 이 은행을 발판으로 통신 전기 가전 자동차 항공 제지 제약 등 거의 전 산업 분야를 아우르는 유럽 최대의 산업 왕국을 건설해 냈다. 스톡홀름의 구시가인 감라 스탄 섬 스토르토리에트 20에는 젊은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처음 은행을 열었던 건물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북유럽 최고의 경영대학으로 꼽히는 스톡홀름경제대학은 ‘발렌베리대학’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의 아들인 크누트 아가손 발렌베리가 1900년대 초 이 대학 설립 논의를 주도하고 거액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스웨덴 경제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기업가들을 길러내는 것이 목표였다. 학부 과정이 없는 대학원 중심 대학인 스톡홀름경제대학은 10 대 1의 높은 경쟁을 뚫어야만 입학할 수 있는 엘리트 스쿨로 자리 잡고 있다. 발렌베리와 이 대학의 특별한 관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의 지주회사 인베스터를 한때 이끌었던 클라에스 달백 전 회장과 야콥 발렌베리 현 회장이 이 대학 이사회에 나란히 들어가 있다.

세계 유일의 ‘기업가 정신 대학’

10년 전 기업가 정신을 전면에 내걸고 문을 연 SSES의 탄생은 스웨덴의 또 다른 기업가 가문과 연결된다. 바로 세계적 패션 브랜드 헤네스&마우리츠(H&M)를 만든 페르손 가문이다. 지난해 인터브랜드 선정, 유럽 최고 브랜드 1위를 차지한 H&M은 1947년 얼링 페르손이 스톡홀름에 스웨덴어로 ‘그녀의 것’을 의미하는 ‘헤네스’라는 이름으로 여성복 매장을 열면서 시작됐다. 문구 체인점으로 성공을 거둔 얼링 페르손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 여행에서 미국식 초대형 매장에 강한 충격을 받고 돌아와 새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그 후 ‘모리츠 위드포스’라는 사냥용 총기점을 인수해 ‘H&M’으로 이름을 바꿨고 첨단 패션 디자인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판다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젊은 여성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현재 H&M은 세계 22개 나라에 1200여 개의 매장을 거느리고 있다.

자신의 이름 딴 재단을 설립한 스테판 페르손 회장은 가장 먼저 1999년 SSES 설립에 거액을 기부했다. 닉 케이 이사는 “SSES는 스테판페르손패밀리재단의 초기 기부 사업 중 하나였다”며 “그는 MBA 과정에서 단순히 큰 기업을 운영하는 방법만 알려줄 게 아니라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조하는 법, 기존의 관념에서 한발 벗어나 사고하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고 확신했다”고 설명했다.

SSES는 여러 면에서 독특하다. 우선 각 분야에서 특화된 스웨덴 최고의 대학들이 참여하고 있다. 초기에는 스톡홀름경제대학과 스웨덴왕립기술대학, 카롤린스카의대 등 3개 대학으로 출발했다. 2002년에는 콘스트팍예술대학이 추가로 들어왔다. 4개 대학 모두 스웨덴 최고의 명문 대학들이다. 게다가 올해는 종합대학인 스톡홀름대학까지 가세해 교육 영역이 더욱 넓어지게 됐다. SSES는 일종의 ‘가상 대학’이다. 실제 강의는 각 대학에서 이뤄지며 SSES는 전체 강의 프로그램 구성과 운영, 마케팅, 연구·개발 등을 맡고 있다.

각 대학 학생들은 누구나 SSES의 코스를 일반 강의와 똑같이 신청해 들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강의실에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미래의 의사 예술가 기술자 경영자가 어깨를 맞대고 앉아 ‘어떻게 사업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기업을 만들어 운영하는지’에 대해 함께 배우고 토론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지금까지 4000여 명이 SSES 코스를 거쳐 갔으며 이들이 만든 120개 이상의 기업이 현재 실제로 운영되고 있다.

기업가 정신 활성화에서 정부 쪽 핵심 기관은 뉴텍이다. 1991년 에너지와 기술 분야까지 포괄하는 정부 기구로 창립된 뉴텍은 2002년 에너지 부문 등을 떼어내고 기업가 정신과 지역 발전에 초점을 맞춘 조직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특히 2006년 중도·보수연합이 사회민주당을 물리치고 집권한 이후 부총리 겸 기업·에너지부 장관에 오른 중도당 출신 마우드 올로프손 대표가 기업 설립 규제 완화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뉴텍의 활동에 한층 힘이 쏠리고 있다. 마우드 올로프손 장관은 창업 비용을 25% 이상 낮출 것을 주문하고 있다.

뉴텍의 목표는 ‘더 많은 신생 기업, 더 많은 성장 기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카린 뤼덴 이사는 “스웨덴은 전통적으로 대기업이 앞에서 끌고 중소기업들이 뒤에서 이를 받쳐주는 구조였는데, 이제 이런 상황은 옛날이야기가 됐다”며 “많은 대기업들이 생산 라인을 해외로 옮기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새로운 기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뉴텍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여성 창업과 이민자 창업이다. 카린 뤼덴 이사는 “남녀평등이 잘돼 있다는 스웨덴에서도 여성은 창업을 위해 은행에서 대출 받기가 남성보다 더 어렵다”고 말했다. 뉴텍은 지난해 880명의 ‘여성 기업가 정신 홍보대사’를 선발했다. 이들은 각 지역별로 학교 수업과 대학 강의, 기타 다양한 모임에 참석해 여성 기업가로서의 자신들의 경험을 들려주고 더 많은 여성들이 기업가가 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게 된다.

기업가 정신 촉진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청소년 시절부터 기업과 기업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해 주는 것이다. 뉴텍은 전국 12곳에 기술 및 기업가 정신 센터인 ‘콤텍’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어린이들에게 기술적 지식과 탐구심, 기업가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각 지역의 선생님과 학부모, 기업가, 혁신가들이 함께하는 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뉴텍에서 2003년부터 매년 18~30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하는 ‘기업가 정신 바로미터’를 보면 기업가가 되고 싶다는 청소년의 비율이 여성은 2003년 23%에서 2008년 30%로, 남성은 35%에서 45%로 각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터뷰│닉 케이 스톡홀름기업가정신대학(SSES) 총괄이사

‘주말 잊은 학습 열기 뜨거워’

1999년 설립된 SSES는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스웨덴의 5개 명문 대학이 참여해 운영하는 학제 간 교육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SSES의 활동은 단순한 교육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닉 케이 이사는 “세계적으로 매우 독특한 대학”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만들어졌나.

스웨덴의 기업가 정신이 북미에 훨씬 뒤떨어진다는데 문제의식을 가진 스톡홀름경제대학과 스웨덴왕립기술대학, 카롤린스카의대 교수 3명이 처음 구상했다. 그러다 1999년 스테판페르손패밀리재단의 기부로 SSES가 출범했다.

어떤 프로그램이 있나.

현재 17개의 정규 코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박사과정도 2개 코스다. SSES의 활동은 크게 동기 촉발, 교육, 훈련 등 3가지다. 정규 코스는 교육에 해당한다. 그밖에 추가 코스로 기업가 등을 초청해 다양한 공개강좌와 워크숍을 연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진행되는 주말 워크숍은 특히 인기가 높다. 프레젠테이션 테크닉, 협상 전략, 인터넷 마케팅 같은 흥미로운 내용을 밀도 있게 집중적으로 교육한다. 스웨덴에서 주말에 학교에 나와 공부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기업들의 참여는 어떤가.

올해 정부와 경제계에서 180여 명이 SSES 프로그램에 연사로 참여한다. 이벤트별로 기업 스폰서도 받고 있지만 돈보다는 귀중한 그들의 시간을 내주는 것이 더 값진 것이다. 마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이나 칼 빌트 외무장관 같은 유명인들도 기꺼이 시간을 내 젊은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업가 정신이 희망이다: 전설로 남은 한국의 기업가들 경제 이슈

‘현재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려면 한국의 정주영 같은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한다.’ 미국 ‘포린폴리시’ 최근호에 실린 내용이다.

이뿐만 아니다. 전화기 한 대로 시작한 삼성상회를 기반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초일류 기업 삼성을 일궈낸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은 해외 경영대학원의 단골 연구 주제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경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울산광역시 동구에 들어서면 ‘조선산업의 메카’라는 커다란 안내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국내 최대 조선사인 현대중공업이 자리해 있으니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지역은 한국을 뛰어넘어 ‘세계 조선 산업의 메카’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현대중공업은 1983년 이후 단 한 차례도 놓치지 않고 줄곧 세계 1위를 달리고 있고 인근에 있는 현대중공업의 자회사 현대미포조선도 세계 4위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울산 동구는 ‘조선 대국 코리아’를 움직이는 심장부다.

지난 2월 10일 오전에 찾은 현대중공업은 ‘제2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경제 위기의 한파에서 한발 비켜난 듯 활기가 느껴졌다. 605만㎡(옛 183만 평)에 달하는 초대형 조선소로, 작업장을 오가는 셔틀버스가 6개 노선이나 운행될 정도다. 하지만 한창 건조 중인 수십 층 빌딩 높이의 선박들이 촘촘히 어깨를 맞대고 있어 오히려 좁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곳 울산 조선소에선 이틀에 한 척 꼴로 거대한 배가 완성돼 나온다. 한 척에 평균 1억6000만 달러인 고가의 초대형 선박들이다. 이날도 야드에선 40척의 배가 건조 작업 중이었다. 안내를 맡은 조용수 부장은 “부지가 좁아지면서 외부 협력 업체에서 블록을 조립해 오고 매립도 하지만 한계에 달했다”며 “군산조선소가 완공돼야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에 대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애정은 각별했다. 설립 초기에는 직원 사택 1단지 1동에 세 번째 입주자로 들어가 몇 년 동안 아예 울산에서 살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새벽녘에 지프를 몰고 공사 현장을 누비다 바다 속으로 추락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다. 그 후로도 정 회장은 1990년대 초 정치 참여 전까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현장에 들이닥쳤다. 1977년부터 10년간 전경련 회장을 맡았을 때는 해외 사절단이 오면 현대중공업 방문 일정을 빼놓지 않고 넣도록 했다. 현대중공업에 대한 자부심이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울산 조선소에서 정 회장의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초창기 건물은 이미 철거된 지 오래다. 본관 건물이 있던 자리도 지난해 최신 인텔리전트 빌딩이 들어섰다. 그나마 정 회장이 매월 1일 전 직원을 모아 놓고 사전 원고도 없이 열변을 토하곤 했던 종합체육관과 노동조합 건물이 그나마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울산에 내려올 때면 현장 직원들과 불고기 파티를 하며 파안대소했던 영빈관 밑 잔디밭도 그때와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현대중공업 탄생에 얽힌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1971년 정 명예회장이 조선소를 지을 울산 백사장 벌판 사진 한 장과 거북선 그림이 들어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달랑 들고 영국 바클레이스은행에서 4300만 달러의 차관을 끌어왔다는 전설적인 스토리다. 과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정 명예회장은 회고록에 조선소 건설을 처음 꿈꾼 것은 1969년부터라고 적고 있다.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 것은 이듬해 현대건설에 조선 사업부를 설치하면서부터다. 당시 중화학공업 육성을 추진하던 정부가 일본 측에 요청해 작성한 ‘아까자와 리포트’는 해운업의 열악한 수준에 비춰볼 때 한국에는 5만 톤급 선박 건조 능력을 갖춘 조선소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최신의 조선소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해외 차관 도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배 한 척 만들어본 적 없는 현대에 선뜻 돈을 빌려 주는 곳은 없었다.

수소문 끝에 정 회장은 영국의 유명한 조선 기술 회사인 애플 도어사의 롬바톰 회장을 찾아 갔다. 하지만 그 역시 현대의 ‘능력’에 의문을 나타냈다. 그때 정 회장은 불쑥 바지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펴 보였다. “영국의 조선 역사는 1800년대부터지만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거북선을 만든 민족입니다.” 이 말을 들은 롬바톰 회장은 빙그레 웃었다. 결국 그의 주선으로 바클레이스은행과 차관 협의가 시작됐다. 바클레이스 측은 한국에 실사단을 파견해 현대가 실제로 배를 만든 적은 없지만 각종 플랜트 건설로 충분한 능력과 기술을 갖췄다는 것을 꼼꼼히 확인했다.

확신이 가능성을 만든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이번에는 영국 수출보증기구가 선박 수주를 먼저 받아오라며 브레이크를 걸었다. 정 회장은 다시 백사장 사진과 영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 도면을 들고 선주들을 만나 ‘선박을 먼저 사주면 그것으로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 주겠다’는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수없이 하며 전 세계를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박왕 오나시스에 버금가는 그리스의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마침 그는 부친이 별세한 후 휘하 선단을 확장 중이었다. 리바노스 회장은 현대에 25만 톤짜리 배 두 척을 주문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리바노스 회장은 2001년 정 회장 타계 직후 보낸 조문에서 “정 명예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며 “정 명예회장을 믿고 유조선을 발주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정 명예회장의 놀라운 확신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딘가 조그만 근거만 있으면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적극적으로 확대해 나가면서 유사한 것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에 자신부터가 신념을 가져야 주위 사람들도 신념을 갖게 되고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경부고속도로도 하고 울산 조선소도 짓고 주베일 공사도 해낸 겁니다.”

울산이 정 명예회장의 기업가적 삶을 대표하는 곳이라면 대구는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꿈과 야망이 시작된 도시다. 1910년 경남 의령의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 회장은 마산에서 정미소와 운수업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차례 참혹한 실패를 경험했다. 그 후 이 회장은 6개월 동안 전국 각지를 도는 꼼꼼한 시장조사 끝에 1938년 3월 대구에 660㎡(200평) 남짓한 점포를 마련하고 ‘삼성상회’란 간판을 걸었다.

이 회장의 나이 28세 때다.

자본금 3만 원으로 출발한 삼성상회는 대구의 사과,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했다. 이후 제분기와 제면기를 설치하고 ‘별표 국수’를 만들어 팔아 큰 인기를 끌었다. ‘별표’라는 상표는 세 개의 별을 뜻하는 ‘삼성’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업이 번창하자 이 회장은 1년 만에 대구에서 첫손에 꼽히던 ‘조선양조’를 인수해 대구 지역의 손꼽히는 사업가로 올라선다. 대구 삼성상회는 광복 후인 1948년 서울로 진출해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할 때까지 이 회장의 든든한 사업 기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대구시 인교동 61의 1, 삼성상회가 있던 곳은 생각보다 썰렁했다. 목조 4층으로 지어진 옛 삼성상회 건물은 1997년 철거됐고 그 자리엔 ‘삼성의 모태가 되는 삼성상회가 있던 자리’라는 표지와 1층을 떠받치던 6개의 기둥, 그리고 간단한 설명 동판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높은 건물이 주변에 들어서 있는데다 수백 개의 공구상이 몰려 있는 공구 골목의 끝자락인 때문에 방문자들이 찾기도 쉽지 않다. 대구 지역 대학생들이 과제물을 만들기 위해 가끔 찾아오는 정도다. 공구 골목 중간쯤엔 이건희 전 회장이 태어나고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유년시절을 보낸 1층 한옥 가정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인교동 일대는 지금은 개발이 더딘 구도심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대구의 상업 중심지였다. 삼성상회 터에서 대구역과 우리나라 3대 장터 중 한 곳으로 유명한 서문시장이 모두 1km 이내 거리에 있다.

서울로 진출한 이 회장은 1년 만에 무역업 순위 7위에 오르는 큰 성공을 거뒀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또다시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대구로 피란 온 이 회장은 뜻밖의 기회를 잡는다. 이 회장은 1948년 서울로 올라갈 때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의 경영을 직원들에게 일임하고 떠났다. 그 후 간혹 편지로 보고를 받았을 뿐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이 그동안 수익금을 꼬박꼬박 모아 3억 원의 자금을 마련해 둔 것이다. 재기 자금을 얻은 이 회장은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재건해 본격적인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과 신뢰를 중시하는 이 회장의 경영 철학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삼성상회 터에서 차로 10분 떨어진 침산동에는 삼성그룹 성장사에 또 다른 이정표가 된 옛 제일모직 터가 자리해 있다. 1954년 설립한 제일모직은 한 해 전 출범한 제일제당과 함께 상업자본으로 커 온 삼성이 산업자본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됐다. 이 회장은 전쟁 후 피폐해진 황무지에서 ‘사업보국’의 기치를 내걸고 제조업을 통해 수입 대체와 자립 경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국내 최초로 현대식 생산 시설을 갖춘 대규모 섬유 공장인 대구공장에서 생산된 순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사업을 위해 살다간 사나이로 남고 싶다’

이 회장은 이때의 감격을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황무지에 공장이 들어서고 수많은 종업원들이 활기에 넘쳐 일에 몰두한다. 쏟아져 나오는 제품의 산더미가 화물차와 트럭에 가득 실려 나간다. 기업가에게는 이렇게 창조와 혁신감에 생동하는 광경을 바라볼 때야말로 바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더없이 소중한 순간인 것이다.”

제일모직 대구공장은 다른 섬유공장과는 출발부터 달랐다. 과거 대구 시민들은 이곳을 ‘제일공원’이라고 부르곤 했다. 수십 년 된 느티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오엽송(잣나무)과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감나무 등 유실수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공장 부지 전체를 잘 다듬어진 정원으로 생각하는, 말하자면 정원 공장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꾸미고 싶었다”고 밝혔다.

제일모직 대구 공장은 1996년 구미사업장으로 통합되면서 폐쇄된 상태다. 24만8000㎡(옛 7만5000평)에 달하던 공장 부지에는 이미 아파트와 대형 유통점이 절반 가까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이 회장의 집무실이 있던 본관 건물과 기숙사만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또 한쪽으로는 2003년 삼성이 지어 대구시에 무상으로 기증한 오페라 하우스가 거대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

건물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이 유럽의 고성을 연상케 하는 기숙사는 현재 삼성전자서비스의 교육장으로 활용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기숙사로 꼽히는 이곳은 미용실 세탁실 목욕실 다리미실 도서실 정원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어 외부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곳이었다. 이 회장의 인재 제일의 경영관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다.

침산동 공장 터를 둘러보던 2월 11일, 시간을 뛰어넘은 듯 까치 2마리가 반갑게 날아와 울고 간다. 삼성상회 터에서 본 ‘호암자전’의 한 구절이 문뜩 떠오른다. “행복 척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생이란 석재에 신도 악마도 새길 수 있다. 다만 나는 그 석재 속에 사업을 위해 살다 간 한 사나이로 새겨졌으면 한다.”

이용태 전 회장, ‘우리 한국인은 타고난 벤처 기업가’ 내가 만난 사람들

‘왜 한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 같은 기업이 나오지 않나?’ 이용태(76) 전 삼보컴퓨터 회장(창업자)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새삼 밀려드는 안타까움으로 또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진다. 미국에서 통계물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자계산기운영실에서 근무하던 이 전 회장은 1971년 인텔의 대규모직접회로(LSI) 개발 소식을 듣고 ‘정보기술(IT) 혁명’을 직감했다. 정보화 시대만큼은 한국이 세계를 리드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았다는 생각에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정부 설득에 나섰다. 마이크로소프트(1975년)와 애플(1977년)이 세상에 나오기 훨씬 전이었다. 그러나 “연구원 100명만 주면 당장 세계 최고의 컴퓨터 회사를 만들 수 있다”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이 전 회장은 1980년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삼보컴퓨터를 직접 창업해 그룹 매출 4조 원대의 대기업으로 키워 냈다. 하지만 국내 나스닥 직상장 1호였던 자회사 두루넷이 2003년 어이없이 무너지면서 그의 꿈도 깨지고 말았다. 경영 은퇴 후 ‘인성 교육 전도사’로 나선 이 전 회장을 지난 1월 21일 성균관대 근처 사무실에서 만났다.

삼보컴퓨터를 어떻게 만들게 됐습니까.

처음부터 사업할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지요. 설득하다 안 돼 직접 나서게 된 거예요. 1969년 말에 귀국해 이듬해부터 과학기술연구소 전자계산기운영실 연구원으로 일했어요. 컴퓨터 역사에서 1971년은 굉장히 중요한 해지요. 인텔이 LSI로 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세계 최초로 내놓았어요. 손톱만한 칩 위에 컴퓨터의 기능을 넣은 겁니다. 그것으로 굉장한 산업적 변화가 일어나겠다는 걸 직감했지요. 대부분 장난감에나 쓰이는 것 아니냐는 냉담한 반응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장차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당시는 4비트짜리 유치한 수준이지만 집적도가 늘어나 슈퍼컴퓨터의 능력을 가질 게 분명했어요. 한국이 그때 앞서 나서기만 하면 세계를 선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열심히 정부를 설득하러 다녔어요.

산업화에 막 들어선 한국이 세계를 선도한다는 게 정말 가능했습니까.

그건 산업의 역사를 보면 답이 나와요. 1946년 1세대 대형 컴퓨터가 처음 상용화됐는데, 그때도 기존 전자공업의 거인들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IBM, 유니백, CDC 같은 신흥 회사들이 등장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갔지요. 1960년대 2세대 미니컴퓨터가 나올 때도 똑같았어요. 이미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1세대 컴퓨터 기업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DEC, 데이터제너럴, 프라임 등 새로운 기업군이 등장해 이끌었어요. 저는 1960년대 미국 유학 시절에 미니컴퓨터 등장을 지켜봤기 때문에 마이크로컴퓨터의 탄생이 우리에게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걸 확신한 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득하셨습니까.

정부에 연구원 100명만 달라고 했지요. 그 시절 100명이면 당장 세계에서 가장 큰 컴퓨터 회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어서면 한국이 컴퓨터에서는 세계 최초,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설득했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무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부에 가서 말하면 ‘무슨 꿈같은 이야기냐’고 했어요. 한국의 전자공업이 유치한 수준일 때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기업인들도 만나보셨습니까.

당시 금성사(현 LG전자)가 가장 규모가 컸고, 삼성은 막 전자공업을 시작할 때였지요. 대기업에도 찾아다니며 열심히 설득했어요. 연구원 100명의 인건비만 지원해 주면 세계 최고의 컴퓨터를 만들어 내겠다고 했지요. 대기업도 제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르는 말 하지 말라’는 식으로 훈계를 들어야 했어요. 한국은 내수시장이 없어 수출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3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우선 1단계로 해외에서 기술을 도입하고, 2단계로는 국내 시장에 팔아보며 기술을 확립해야 하고, 그다음 마지막으로 수출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최신 컴퓨터 기술을 한국에 줄 리가 없고 국내 시장까지 없으니 말도 안 된다는 논리였어요. 그러면 좋다, 내가 직접 해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 거죠.

처음 만든 게 삼보컴퓨터였습니까.

10년 동안 여기저기 열심히 설득하고 다니다 포기하고 창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마침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이었어요. ‘나가서 정보통신 기업 100개를 만들겠다.’ 그렇게 약속하고 연구소를 그만두었지요. 당시 대량 해직으로 실직자가 된 공무원들이 많았어요. 1000만 원씩 10명이 모으면 1억 원이고, 그러면 회사 하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YMCA 호텔에 방을 하나 얻어 인큐베이션 룸으로 삼았어요. 제일 먼저 컴퓨터 하드웨어를 만드는 삼보컴퓨터와 컴퓨터를 판매하는 엘렉스, 하드웨어 기술 개발 업체 큐닉스, 소프트웨어 업체 한국소프트웨어연구소(KSI), 컴퓨터 인력을 키우는 코콘 등을 만들었어요. 처음부터 기업군으로 출발한 겁니다. 그 후로도 힘이 닿는 대로 회사를 계속 만들어 나갔어요.

인텔의 LSI를 보고 느꼈던 흥분을 또 느끼신 적이 있으십니까.

두루넷이 바로 그런 경우였어요. 1996년 두루넷은 한국전력이 깔아 놓은 광통신망 독점권을 얻어 세계 최초로 브로드밴드 인터넷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도 한국통신이나 정부는 불가능하다고 반대했지만 과감하게 뛰어들어 한국을 브로드밴드 인터넷 1등 국가로 올려놓은 것 아닙니까. 세계 어느 나라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때 시작해 가입자 100만 가구를 확보하니까 한국통신과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이 가세해 저가 공세를 편 거죠. 두루넷은 망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때문에 우리나라는 브로드밴드 인터넷 강국이 된 겁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도 IT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던데요.

하루는 박태준 전 회장이 포스코가 향후 산업화 시대에 철강으로 했던 역할을 정보화 시대에도 하려고 하니 나보고 도와 달라고 만나자고 해요. 박 전 회장 말씀이 이래요. ‘광양제철소가 완공되면 포스코 설비 확장은 사실상 마무리된다. 그런데 포스코 순이익이 매년 2조 원 정도 남는데 그중 1조 원씩을 10년간 IT에 투자하겠다. 포스코 내에 이 일을 맡아 할 사람이 없으니 이 회장이 맡아 달라.’ 정말 깜짝 놀랐어요. 꿈인가 싶었죠. 아무 조건 없이 하겠다고 그랬어요. 63빌딩에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사무실을 하나 마련해 줬어요. 바로 1990년대 초반이었지요. 그런데 참 불행한 것이 정치권에 있던 박 전 회장이 김영삼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갈등을 빚다 결국 일본으로 나가면서 이 일을 직접 챙기지 못했어요. 밑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책임지고 나서려 하지 않았어요. 결국 준비 중인 이동통신 사업이 어느 정도 가닥을 잡으면 그때 검토하자는 식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어요.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박 전 회장을 직접 만났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어요. 요즘도 박 전 회장을 만나면 서로 책상을 치며 통탄합니다. 정말 기가 막힌 기회를 놓친 거죠. 국가를 위해서나 포스코를 위해서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최근 기업가 정신의 쇠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저는 한국이야말로 ‘기업가 정신의 나라’ ‘벤처 정신의 나라’라고 생각해요. 그건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일본과 한번 비교해 보죠. 일본은 과거 봉건시대에 270여 개의 작은 나라로 갈라져 있었지요. 엄격한 계급제도 때문에 신분 이동이 불가능했어요. 칼 만드는 사람은 일생 동안 죽자 사자 칼만 만들어야 했지 다른 것을 할 생각은 못했어요. 신분 차가 워낙 커 칼 한 번 잘못 만들면 목이 달아났어요. 지금도 일본 종업원들은 맡은 것 하나만 죽자 사자 열심히 해요. 수백 년 동안 그런 문화가 축적된 겁니다. 반면 한국은 958년 고려 광종 때 중앙집권화가 됐어요. 과거제도가 도입돼 관리를 중앙에서 뽑아 지방에 파견하는 등 지방 호족의 권력을 모두 빼앗았지요. 과거제도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뒷배경이 없어도 정승·판서가 될 수 있게 됐어요. 정승 아들이 정승이 되는 게 아니라 똑똑하면 누구나 정승이 될 수 있는 거죠. 그러니 한국 사람들은 누가 잘 돼도 ‘나라고 왜 못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저녁에 주택가를 한번 보세요. 네온사인 십자가가 숲을 이루고 있어요. 목사도 남 밑에서 안 해요. 전부 자기가 차려 직접 하려고 하지요.

하지만 벤처 활동이 예전만 못하지 않습니까.

한국 사람은 타고난 벤처 기업가예요. 벤처 정신은 있는데 2000년대 초 벤처 거품이 터지면서 막대한 피해를 봤기 때문에 한동안 움츠러들고 있는 거죠. 하지만 결국은 벤처가 산업을 살리고 고용을 창출하는 근본이기 때문에 이를 다시 활성화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벤처 산업이 활발하게 돌아갈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먼저 마련돼야죠.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는…

1933년 경북 영덕 출생. 57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69년 미 유타대 통계물리학 박사. 64년 이화여대 교수. 73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전자계산기운영실 실장. 78년 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 82년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89년 삼보컴퓨터 회장. 96년 두루넷 회장. 98년 숙명학원 이사장(현). 9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2007년 볼런티어21 이사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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